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이판 전투 (문단 편집) == 원인 == [[미드웨이 해전]] 이후 과달카날, 알류산 열도, 애투, 타라와, 마킨 섬 등 패전을 거듭한 [[일본군]]은 1943년 9월 [[인도네시아]] - [[뉴기니]] - [[필리핀]] - [[북마리아나 제도|마리아나 제도]]를 잇는 이른바 "[[절대방위선|절대국방권]]"을 설정한다. 일종의 최후 방어선으로, 이 선에서 반드시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4년에 들어서자 길버트 제도와 [[솔로몬 제도]] 전체가 넘어가고 절대국방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 방어선의 최전선이었던 [[마셜 제도]]가 뚫려버렸다. 계속되는 승리와 막대한 물량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미국]]은 일본 본토와 가까우며, 새로이 개발된 [[미 육군]] [[육군 항공대|항공대]]의 초장거리 [[폭격기]] [[B-29]]의 기착지로도 매력적인 [[북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 섬에 대한 공략을 준비한다.[* 사이판만 먹으면 [[도쿄]], [[오사카]], [[교토]] 등 일본 주요 도시들을 B-29의 [[놀이터]]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일본군은 부랴부랴 [[사이판]]의 방어 준비를 서둘러 사이판 남부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타포차우산 일대에 레이더 기지까지 설치했다. > 나는 개인적으로 사이판 섬 방어시설을 '''확실하게''' 보장합니다. > [[도조 히데키]], 사이판 방어시설 강화를 계속 요구하는 해군의 [[https://en.wikipedia.org/wiki/Ry%C5%ABnosuke_Kusaka|구사카 류노스케]] 중장에 보내는 서신에서 > '''육군은 미군이 상륙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 위의 편지를 전달한 육군 대좌 그러나 [[어뢰 스캔들|개전 초기의 어뢰 문제]]를 해결한 [[미 해군]]의 [[잠수함]]이 들끓는 바람에 사이판으로 향하던 [[일본 육군]]과 [[해군]]의 수송선이 대거 격침되면서 수많은 물자와 장비와 병력이 바닷속으로 사라져버렸으며, 살아남은 수송선조차도 사이판에 접근을 못 하고 가까운 [[대만]]이나 [[오키나와]]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에 사이판에는 애초의 계획과는 거리가 먼 3만여명의 병력만이 집결할 수 있었고, 격침된 수송선에서 구조된 병력은 장비를 대부분 상실해 맨몸에 가까운 상태라 전력이라 할 수 없는 상황이였다. 또한 사이판을 공격하기 전, 미 해군 함대가 주변의 일본 육해군 비행장을 초토화시켜놓아서 항공력까지 전무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중국]] 전선에서 [[국민혁명군|국민당 육군]]의 예상치 못한 선전으로 인하여 [[북마리아나 제도|마리아나 제도]]로 전용하려던 [[관동군]] 병력들의 발이 묶여 버린 것도 일본으로선 치명타였다. 원래 일본 [[대본영]]은 1943년 말에 중국 중부 방면군에서 [[육군]] 제3[[사단(군사)|사단]]과 제13사단을 마리아나 제도로 보내기로 결정했으나, 동정호 서안의 [[도시]]인 상덕[* 중국판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지칭되기도 한다. 다만, 11군장 요코야마 중장의 재빠른 철수 명령과 소련군과 달리 국부군은 대규모 기갑부대와 공군력이 부재했기에 포위섬멸에는 실패하였다. 양측 모두 수만 단위의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나, 더 이상의 전략예비대가 없던데다 그나마 멀쩡한 부대들은 모조리 미국의 압력으로 버마 공략에 투입되어버린 탓에 중국군에게 다음 해에 벌어진 [[대륙타통작전]]은 치명적이었다.]에서 벌어진 전투가 계획된 기간 이상으로 질질 끌다가 끝나자, 아예 [[대륙타통작전]]을 새로 수립하면서 해당 사단의 마리아나 제도 파견을 취소했다. 그 바람에 [[괌]]과 [[사이판]]에 각각 2개 사단을 배치시켜 방어하려던 원래의 발상이 1개 사단으로 축소되면서 심각한 전투력 저하가 발생한 것이다. 병력들을 모두 사이판에만 집중시킬 수도 없었다. [[괌]]이나 [[티니안]]도 덤으로 방어해야 했던 데다, 당시 대본영에서는 [[미군]]이 마리아나보다는 [[팔라우]] 쪽으로 먼저 치고 와서 [[필리핀]]을 수복할 교두보로 삼을 거라고 생각했던 의견들도 만만치 않았고, 최소한 미군이 그 둘 중에서 간보는 시간이라도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사이판에 그렇게 일찍 오리라고는 예상도 못 하고 있었다.[* 사이판과 괌이 있는 마리아나 제도와 팔라우, 트럭 등이 있는 캐롤라인 제도 방어를 위해서 31군을 창설하고 사령부를 사이판에 설치했지만, 정작 사이판에 미군이 상륙했을 때 31군 사령관 오바타 히데요시는 팔라우를 시찰하고 있다가 도조에게 당장 귀대하라며 욕을 먹으면서도, 한참 지옥도가 시작된 사이판에 귀대를 못 하고 괌에 임시 사령부를 차려놓게 된다. 이 외에도 미군의 공격으로 사이판에 집결하지 못한 부대들도 있었지만, 미군 어뢰 때문에 팔라우나 트럭으로 가야 할 병력들이 사이판에 발이 묶여 있다가 전투를 맞게 된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팔라우 - 필리핀' 루트를 경시했다가는 본토와 자원 생산지의 연결이 확 끊기는 사단이 생길지도 모르니 저쪽을 경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셜 제도 전투에서 보았듯 미군의 정보력은 생각보다 대단했고[* 미군은 마셜 제도의 섬들 중 사령부가 있는 콰잘레인 섬이 병력의 분산으로 도리어 전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콰잘레인부터 가장 먼저 쳐버렸다.], 약한 고리가 있다면 그 곳을 먼저 옥쇄지로 만들어 놓았을 테니 말이다.[* 일본군이 팔라우 쪽에 방어를 집중했다면 마리아나 쪽을 쳤을 거고, 그 반대였다면 필리핀을 어떻게든 탈환하고 싶어하는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가 팔라우를 지나 필리핀으로 직행해버릴 터였다.] 이렇게 된 원인으로는 사이판 전투 3개월 전에 일어난 '''해군 을''' 사건 때문이었다. 3월 30일, 미 해군이 팔라우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하였다. 이에 일본 제국은 연합함대 사령장관 코가 미네이치와 참모장 후쿠도메 시게루를 포함한 주요 지휘관들을 수송기를 통해 안전한 장소로 대피시켰는데, 이들이 탑승한 수송기가 민다나오 다바오 기지로 이동하던 중 폭풍을 만나 '''추락'''해버리고 말았다. 사령장관 코가 미네이치를 포함한 다수의 지휘관, 참모들이 사망하였고[* 넓은 바다 한복판에 추락한 탓에 수송기 잔해는 물론 코가 미네이치의 시신까지 모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참모장 후쿠도메 시게루는 겨우 살아남았지만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던 반 일본 필리핀 게릴라 부대에 포로로 붙잡히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전임 연합함대 [[야마모토 이소로쿠|사령장관]] 및 참모장과의 운명이 같았는데 원인의 차이일 뿐 모두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 및 부상을 당했다. 후쿠도메 시게루는 사태를 파악한 일본군이 인근 지역에 주둔하던 부대를 동원해서 게릴라 부대에 맹공격을 퍼부은 끝에 공격 중단을 조건으로 포로의 신변을 인계받으며 구출하는데 성공했으나, 문제는 추락한 수송기에는 코가 미네이치 사령장관이 추진하던 일본 해군의 향후 '''전략방어계획이었던 新Z작전의 모든 서류'''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고 이 서류 가방이 바다를 떠다니다 해안가로 밀려들어와 지역에 살던 주민 손에 들어갔고, 게릴라 부대를 통해 '''미군의 손에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미군이 정보자산을 총동원하여 일본군의 방어계획을 글자 단위로 분석하는 상황에서, 일본군은 한번 포로로 붙잡힌 후쿠도메 시게루의 처분을 두고[* 당시 일본군은 항복하는 행위 자체를 대역죄에 준하는 대죄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합함대 참모장이라는 최고위직이 포로가 되었다? 원래대로면 참모장이고 뭐고 중벌을 받아야했지만 후쿠도메 시게루 본인은 추락 이후 사고를 당한거지 스스로 포로를 자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고 워낙 고위직이라 처벌 여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옥신각신하고만 있을 뿐 자신들의 방어 계획이 유출되었다는 사실은 파악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미 해군은 일본 연합함대의 향후 방침을 모두 파악하였고, 공격 목표를 사이판 섬으로 결정. 일본 해군이 함대 결전을 준비하기도 전에 선제적으로 사이판을 공격하여 연합 함대를 끌어들여 섬멸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여담으로 미군 손에 들어간 작전 서류는 미군이 모든 분석을 마친 다음 다시 봉인한 다음 추락 지점 근처에 몰래 버려두었다. 나중에 일본군은 이를 발견하고 작전이 적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 같다며 안심했다.] 지휘관 인선 또한 최악이었는데, 수비대의 핵심인 43사단장 사이토 요시츠구 중장은 기병 병과 출신으로, 기병 부대에서 오래 복무하긴 했지만,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진 못하고 관동군에서 보충마창장, 군마보충부장, 즉 군마를 관리하고 조달하는 업무를 맡다가 사이판에 발령난 사람이었다.[* 그 전 사단장은 황족인 가야노미야 츠네노리 왕(賀陽宮恒憲王)이었다. 이쪽이야말로 사실 한 술 더 떴는데, 그나마 지휘부가 바뀐 때가 1944년 4월이었다. 그리고 43사단이 사이판에 상륙 완료한 해는 44년 5월. 그나마 2선 부대의 경우는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서 장비를 많이 상실한 상태였다. 43사단 외에는 일부 혼성여단이나 야포대대 정도의 육군 부대와 해군 부대 약간이 있었다.] 물론 보급부대에 근무했다고 [[무능]]한 건 아니긴 하지만, 오직 일선 전투 부대와 도쿄의 참모본부만을 중요시 여기는 일본군에서 야전을 오래 떠나 있던 보급부대 담당 장교한테 총지휘관을 맡겼다는 것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사이판 전투의 총책임자는 31군 사령관인 오바타 히데요시였으나, 상술했듯 팔라우 출장 중에 미군이 상륙하는 바람에 사이판에 가지 못했던 탓에 저리 되었던 것이기는 하다.] 그나마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중부 태평양 사령관에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나구모 역시 미드웨이 해전 참패 이후 [[한직]]들만 전전하다 부임한 상황이었으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